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르만 왕조 (문단 편집) == [[몽골-타타르의 멍에|노르만의 멍에 (Norman Yoke)]] == 중세 이후 잉글랜드 내에서 근대적인 내셔널리즘이 싹트며 노르만 왕조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19세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유행한 휘그 사관(Whig Historiography)[* 이 사관에 따르면 영국의 역사는 전제 군주와 이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의회간의 정치적 투쟁으로 이러한 과거의 사건들(예들 들어 [[영국 내전]])은 최종적으로 의회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로 가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이러한 진보의 원동력을 영국이 개신교 국가가 된 것에서 찾고 있다.]은 중세의 앵글로색슨족 사회는 비교적 수평적이었고 자유민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등 비교적 평등했던데 비해 대륙에서 [[봉건제]]를 들여온 노르만족 지배자들은 권위적인 압제자들로 그렸다. 특히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 이후 반가톨릭주의가 잉글랜드의 국가 정체성으로 이어지자 개신교 영국인들은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전 교황의 후원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로 노르만 왕조가 들어선 이후 잉글랜드가 더욱 가톨릭의 영향력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는 노르만 정복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르망디 공국을 비롯한 노르만족의 프랑스 내 영지가 건재할 당시에는 [[잉글랜드 왕국]]의 위상이 시궁창이었다. 군주의 칭호만 왕일 뿐 다스리는 영토는 노르망디, 아키텐, 브르타뉴 등의 프랑스 영지와 비교하자면 정말 비루하기 짝이 없어서, 노르만 왕조의 왕들은 일단 잉글랜드 왕위가 안정된 후에는 프랑스 내에서의 알력다툼과 그곳의 통치에만 관심을 뒀고, 잉글랜드는 그냥 양모 및 소고기 공장쯤으로(...) 생각했다. 왕실을 따라온 노르만족 기사들에게는 잉글랜드가 기회의 땅이었지만, 원래도 기득권층이었던 왕실에게는 프랑스 왕과 대등한 타이틀을 주는, 타이틀 셔틀일 뿐이었다. 이러한 경향이 뒤집어진 건 [[존 왕]] 때로, 그는 영국사 최악의 왕으로 꼽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잉글랜드의 지배층이 점차 노르만 정체성을 버리고 잉글랜드에 동화되게 만들어버린, 업적 아닌 업적(?)을 가지고 있다. 존은 [[필리프 2세]]의 온갖 모략질에 두 눈 뜨고 전부 당해주며 노르만-플랜태저넷 왕조가 가진 프랑스 영지를 죄다 빼앗겼고, 결국 프랑스에서의 입지를 잃어버린 노르만족 지배층들은 이제 프랑스의 마수가 뻗치지 않은 청정구역인 잉글랜드에 집중해야만 했다. 이후 [[헨리 3세]]가 [[참회왕 에드워드]]를 기리며 자식에게 그 이름을 물려주었는데, 그가 바로 [[에드워드 1세]]다. 그는 스스로를 잉글랜드인으로 여기며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했고, 고관대작들에게도 영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이후 시대가 흘러 [[에드워드 3세]] 때 [[백년전쟁]]이 발발, 최종적으로 패배함에 따라 프랑스의 잉글랜드 세력이 완전히 축출[* 칼레는 남아있었지만, 보다시피 '세력'이라고 부를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되며 프랑스와는 완전히 결별하고, 마침내 잉글랜드를 옥죄어온 앵글로-노르만족의 정체성도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